대중문화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작금의 ‘K-컬처 붐’이 전례 없던 현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실제로 시간을 조금만 소급해 보면 비슷한 현상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2000년대 초반 몇몇 드라마를 중심으로 불었던 한류 열풍은 국내 관광 상품 개발로 이어졌고, 2010년대 초반 싸이를 중심으로 일었던 한류 열풍은 한국인의 ‘흥’을 세계 무대에 널리 알리며 해외 유명 가수들의 내한 공연이 본격화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현재의 동향과 사정거리에서 차이가 날 뿐, 한류는 우리나라가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한 이래로 늘 있어 왔다는 거다. 그런데 왜 이 흐름은 지속되지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국내 문화예술장이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거나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으면서 그저 ‘국뽕’에 취해 안주했던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온갖 종류의 문화가 ‘K’라는 라벨링을 단 채 유통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몇몇 문화적 사건을 경유함으로써 국내 문화예술 담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업들을 톺아본다. 이 일련의 작업이 ‘지속 가능한’ 한류를 상상해 보는 맨 앞줄에 놓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사랑은 정말 모든 걸 이길까?
지난 1월, 아이유가 <Love wins>라는 제목의 신곡 발매를 예고하자 온라인상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해당 제목이 성소수자의 구호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아이유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Love wins’의 ‘Love’가 ‘사랑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성소수자를 포괄할 뿐만 아니라 해당 표어가 과거 다양한 서적, 영화, 음반 등의 제목으로 빈번하게 사용돼 왔다고 주장했다. 반면 비판하는 쪽에서는 해당 표어가 미연방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2015년 온오프라인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운동 구호로 광범위하게 쓰였다는 점, 2016년 올랜도 게이클럽의 총기 난사 사건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역시 연대의 구호로 재차 등장했다는 점, 이후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집회 및 행사에서 공공연하게 등장한 ‘맥락 특수적인’ 슬로건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Love Wins’가 ‘팬들에게 바치는 곡’의 제목으로서도 또 이성애 커플의 서사를 담아내는 뮤직비디오의 제목으로서도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아이유 측은 비판을 빠르게 수용하며 제목을 <Love wins all>(이하 <Love>)로 변경했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공식 MV(Music Video)가 공개되자마자 제목을 향해 겨눠진 비판의 칼날이 장애의 ‘소재적 차용’ 문제로 옮겨간 것이다. MV에 제기된 비판은 구체적으로, 극 중 청각 장애와 시각 장애를 앓고 있는 남녀 주인공이 자신들을 뒤쫓는 ‘네모 상자’를 피해 몸을 숨긴 곳에서 우연히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넣고, 카메라 뷰파인더 너머로 어떠한 ‘결함’도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자신들의 환영을 보는 것과 관련한다.
아이유 측은 비판을 빠르게 수용하며 제목을 <Love wins all>(이하 <Love>)로 변경했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공식 MV(Music Video)가 공개되자마자 제목을 향해 겨눠진 비판의 칼날이 장애의 ‘소재적 차용’ 문제로 옮겨간 것이다. MV에 제기된 비판은 구체적으로, 극 중 청각 장애와 시각 장애를 앓고 있는 남녀 주인공이 자신들을 뒤쫓는 ‘네모 상자’를 피해 몸을 숨긴 곳에서 우연히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넣고, 카메라 뷰파인더 너머로 어떠한 ‘결함’도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자신들의 환영을 보는 것과 관련한다.
아이유 <Love wins all> 메인 포스터 (사진출처: EDAM엔터테인먼트)
여기서 고려할 것은 위 MV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디스토피아물은 SF(Science Fiction)라는 장르적 형식에 기대어 있기에 해당 장르의 고전적인 주제나 소재, 문제의식, 연출 방식, 촉발시키는 쟁점 등을 폭넓게 공유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술’에 관한 사유는 SF라는 장르의 존재론적·인식론적 토대라는 점에서 SF 논의에서 남다른 위상을 차지한다. 쉽게 말해 카메라라는 기술-장치를 매개로 모종의 환상을 엿본다는 설정은 <Love> MV가 디스토피아물의 형식을 차용하는 이상 주인공의 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성립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럼에도 주인공을 장애인으로 설정했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 물음은 주인공에게서 ‘장애’를 지운다 한들 주제 전달에 심각한 오류가 생기는 것은 아니며, 이는 가상의 장애가 현실의 장애 해방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또는 맺을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은 부재한 채 단지 서사를 더 극적으로 만드는 도구로 쓰였다는 비판을 함축한다. 폐허가 된 세계, 쫓기는 주인공, 우연히 찾은 낡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 비치는 전생인지 환생인지 모를 환영. 이 모든 장르적 클리셰가 ‘혐오를 이기는 사랑’이라는 당위적 메시지 아래서 하나의 이성애 서사로 봉합될 때 동성애는 휘발되고, 장애는 부차화된다. 이 눈물겨운 로맨스 어디에도 타자를 위한 자리는 마련돼 있지 않은 셈이다.
위 물음은 주인공에게서 ‘장애’를 지운다 한들 주제 전달에 심각한 오류가 생기는 것은 아니며, 이는 가상의 장애가 현실의 장애 해방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또는 맺을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은 부재한 채 단지 서사를 더 극적으로 만드는 도구로 쓰였다는 비판을 함축한다. 폐허가 된 세계, 쫓기는 주인공, 우연히 찾은 낡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 비치는 전생인지 환생인지 모를 환영. 이 모든 장르적 클리셰가 ‘혐오를 이기는 사랑’이라는 당위적 메시지 아래서 하나의 이성애 서사로 봉합될 때 동성애는 휘발되고, 장애는 부차화된다. 이 눈물겨운 로맨스 어디에도 타자를 위한 자리는 마련돼 있지 않은 셈이다.
2. <인어공주>의 실패 = PC의 실패?
그러므로 문제는 빈곤한 상상이 아니라 그 빈곤을 장르적 특성이나 이미지 연출로 해결하려는 나태와 무능, 그리고 오만이다. 눈여겨볼 것은 이런 경향이 최근 몇 년간 국내 문화예술장 안에서 꾸준히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이하 PC)’ 1)논쟁, 특히 넷플릭스(Netflix)나 디즈니(Disney)와 같은 거대 자본의 노골적인 PC 전략과 공명하며 하나의 거대한 ‘비판 담론-클러스터(cluster)’를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문화생산물의 서사 및 세계관 구축에 있어서 불필요하거나 역사적 고증에 맞지 않는 과도한 설정을 ‘끼워 넣는’ 것은 책임감 있는 PC 실천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식 PC’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차별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행태는 부르주아-엘리트의 도덕적 나르시시즘이자 대중-소비자에 대한 기만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2023)다. <인어공주>는 제작 이전부터 개봉 이후까지 잡음이 끊이질 않던 작품인데, 제작사 측에서 원작과 달리 주인공 ‘에리얼(Ariel)’ 역에 흑인 배우를 캐스팅하고는 이에 반대하는 팬들을 향해 조롱 섞인 공식 입장을 발표한 까닭이다-입장문의 제목은 무려 ‘가엾고 불행한 영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An open letter to the Poor, Unfortunate Souls)’였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2023)다. <인어공주>는 제작 이전부터 개봉 이후까지 잡음이 끊이질 않던 작품인데, 제작사 측에서 원작과 달리 주인공 ‘에리얼(Ariel)’ 역에 흑인 배우를 캐스팅하고는 이에 반대하는 팬들을 향해 조롱 섞인 공식 입장을 발표한 까닭이다-입장문의 제목은 무려 ‘가엾고 불행한 영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An open letter to the Poor, Unfortunate Souls)’였다(!)-.
1) ‘정치적 올바름’은 통상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지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되며, ‘다양성 추구’와도 폭넓은 교집합을 가진다.
영화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포스터 (사진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나 글로벌 문화기업이 대중성과 상업성이 보장된 문화생산물에서 보다 다양한 존재를 조명하는 일은 ‘가시화’라는 차원에서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될 여지가 있다. 이는 시야 밖으로 내쳐져 사실상 ‘비존재’로 치부되던 타자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증언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모종의 균열을 감각하게 하고, 나아가 미디어가 무엇을, 왜, 어떻게 보여주는지/보여주지 않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둬야 할 것은 ‘양적 팽창’과 ‘질적 성숙’이 동의어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재현의 양(quantity)이 재현의 질(quality)을 대신하거나 상쇄할 수는 없으며, 나는 겨우 ‘표본 증가’로 충분하다며 자위하고 싶지도 않다. 가시화는 미학의 정치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성급하게 ‘PC의 실패’로 결론지어서도 안 된다. ‘<인어공주>의 실패 = PC의 실패’라는 도식을 반증할 만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바비 인형을 서사화, 실사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캐릭터에 부여함으로써 여성 서사로 다시 쓰인 <바비(Barbie)>(2023)나 탐정 소설의 대표격인 셜록 홈즈의 추리 능력에 젠더 변인을 결합함으로써 새롭게 탄생한 <에놀라 홈즈(Enola Holmes)>(2020)는 대중과 전문가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았고, 마블 최초의 ‘흑인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운 <블랙 펜서(Black Panther)>(2018)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오스카는 하얗다’는 공식을 깨트렸다. <모아나(Moana)>(2017)나 <겨울왕국(Frozen)>(2014)은 디즈니 ‘오리지널 프린세스’의 오랜 관습을 탈피함으로써 진일보한 내용 및 형식, 상업적 성공, 대중적 흥행 모두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간단히 말해서 <인어공주>의 실패 원인은 PC에 있다기보다는 PC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콘텐츠다운 콘텐츠’를 내놓지 못한 데에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성급하게 ‘PC의 실패’로 결론지어서도 안 된다. ‘<인어공주>의 실패 = PC의 실패’라는 도식을 반증할 만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바비 인형을 서사화, 실사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캐릭터에 부여함으로써 여성 서사로 다시 쓰인 <바비(Barbie)>(2023)나 탐정 소설의 대표격인 셜록 홈즈의 추리 능력에 젠더 변인을 결합함으로써 새롭게 탄생한 <에놀라 홈즈(Enola Holmes)>(2020)는 대중과 전문가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았고, 마블 최초의 ‘흑인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운 <블랙 펜서(Black Panther)>(2018)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오스카는 하얗다’는 공식을 깨트렸다. <모아나(Moana)>(2017)나 <겨울왕국(Frozen)>(2014)은 디즈니 ‘오리지널 프린세스’의 오랜 관습을 탈피함으로써 진일보한 내용 및 형식, 상업적 성공, 대중적 흥행 모두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간단히 말해서 <인어공주>의 실패 원인은 PC에 있다기보다는 PC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콘텐츠다운 콘텐츠’를 내놓지 못한 데에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는 거다.
영화 <에놀라 홈즈(Enola Holmes)>(좌)와 <겨울왕국(Frozen)>(우) 포스터 (사진출처: 넷플릭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그보다 강조돼야 할 것은 위와 같은 단편적인 사고가 PC와 콘텐츠의 완성도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문가 담론과 대중 담론을 막론하고 현재 문화예술장 안에서 ‘도덕적 감수성’과 ‘미학적 완성도’가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제시되는 경향과도 연관되는데, 이러한 대립 구도는 ‘비미학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엄격한 구분 및 위계를 전제하는 동시에 후자를 성역화하는 이른바 ‘미학적 보수주의’를 배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단편화·단순화하는 이원적 사유이자 수호하고자 하는 것(즉 ‘미학적인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따져 묻지도 않으면서 그저 미학의 내외부만을 구분 짓는 관성적인 태도가 아닐까?
3. ‘전유’라는 문제틀 삽입하기
<Love>와 <인어공주>의 인접 지대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축적된 담론 지형을 살필 때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논의 전개 과정에서 ‘전유’라는 대중문화의 주요 역학이 자주 누락되거나 간과된다는 사실이다. ‘전유(appropriation)’란 기존의 것을 본래의 맥락에서 탈구시켜 새롭게 재배열·재배치하는 행위를 통칭하는 것으로, 그 범위는 ‘nigger’나 ‘queer’, ‘freak’ 등에 투여된 경멸적인 함의를 걷어내고 이를 자긍심의 언어로 전환한 여러 해방 운동의 역사에서부터 남성용 소변기나 슈퍼마켓에서 파는 브릴로 박스를 하나의 ‘작품’으로서 미술관에 들여놓은 현대 미술의 고유 명사, 아이돌 팬덤의 팬픽 문화나 오타쿠 문화, 디지털 아카이빙에 기초하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필름 및 밈(meme)의 대량 유통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며 다룰 수 있는 사례도 무궁무진하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전유의 개별 사례들이 ‘원작’과 ‘n차 창작(물)’의 관계 성찰을 요구하는 동시에 고전 미학이 상정해온 ‘문화생산자-문화생산물-문화수용자’라는 일방향적이고도 단선적인 연결을 심문에 붙인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생산자는 ‘작품’이라는 완결된 소우주의 ‘창조주’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그 반대항에 놓인 수용자는 생산자가 발송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1970~1980년대 이른바 ‘포스트(Post-)’로의 사상사적 전환-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기술매체의 비약적인 발전, 이에 따른 대중/하위문화의 급격한 분화 등을 배경으로 수용자의 잠재적인 힘을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방면에서 이뤄져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저자-아버지라는 절대 권력을 지우고 완성·완결된 작품을 미완성·미결의 텍스트로 전환함으로써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그간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겨지던 문화생산물이 이제는 수용자의 ‘창조적 오독’을 거쳐 의미가 갱신되는 가동적·역동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생산자든 수용자든 문화예술의 행위자는 더 이상 주어진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상술한 내용을 <Love>나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담론을 재사유하는 하나의 문제틀로 간주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왜 어떤 전유는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어떤 전유는 무가치하거나 심지어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 또 이러한 미학적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혹 이 모순적이고도 이율배반적인 태도 역시 우리의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미학적 보수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공백으로 방치돼온 이 질문들을 해결하지 않는 한 ‘올바른 문화’에 대한 논의는 공회전만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장에 발 딛고 선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나태와 무능, 오만’이라는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전유의 개별 사례들이 ‘원작’과 ‘n차 창작(물)’의 관계 성찰을 요구하는 동시에 고전 미학이 상정해온 ‘문화생산자-문화생산물-문화수용자’라는 일방향적이고도 단선적인 연결을 심문에 붙인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생산자는 ‘작품’이라는 완결된 소우주의 ‘창조주’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그 반대항에 놓인 수용자는 생산자가 발송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1970~1980년대 이른바 ‘포스트(Post-)’로의 사상사적 전환-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기술매체의 비약적인 발전, 이에 따른 대중/하위문화의 급격한 분화 등을 배경으로 수용자의 잠재적인 힘을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방면에서 이뤄져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저자-아버지라는 절대 권력을 지우고 완성·완결된 작품을 미완성·미결의 텍스트로 전환함으로써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그간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겨지던 문화생산물이 이제는 수용자의 ‘창조적 오독’을 거쳐 의미가 갱신되는 가동적·역동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생산자든 수용자든 문화예술의 행위자는 더 이상 주어진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상술한 내용을 <Love>나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담론을 재사유하는 하나의 문제틀로 간주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왜 어떤 전유는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어떤 전유는 무가치하거나 심지어는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 또 이러한 미학적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며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혹 이 모순적이고도 이율배반적인 태도 역시 우리의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미학적 보수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공백으로 방치돼온 이 질문들을 해결하지 않는 한 ‘올바른 문화’에 대한 논의는 공회전만 거듭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장에 발 딛고 선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나태와 무능, 오만’이라는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4. 올바른 문화에서 지속 가능한 문화로
나는 그간 다양한 채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올바른 문화예술에 대한 논의가 보다 입체화돼야 하며 이를 방해하는 기제로서 ‘미학적 보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왔다.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진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공동체에 보탬이 되겠다는 선한 의지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문화예술의 생산자 또는 수용자가 제 역할만 ‘잘’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도리어 문화예술장 내부에 자리하는 행위자들 모두가 저마다의 몫을 ‘따로 또 같이’ 수행해 나갈 때 비로소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예술의 오랜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미학적 보수주의’는 시시때때로 표정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어느 날엔 ‘원작’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 어느 날엔 ‘역사적 고증’이나 ‘민족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또 어느 날엔 윤리나 정치의 문제가 예술의 주된 관심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이렇게 온갖 종류의 ‘미학적인 것’을 이유로 PC를 배척할 때 현실의 누군가는 삶다운 삶을 계속해서 유예 당하고 문화예술은 그에 공모하거나 최소한 방관하는 위치에 놓이게 됨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이는 실제 문화예술 내 PC 논쟁에서도 자주 간과되는 것 중 하나인데, PC는 사상이나 학문 체계 안에서만 맴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차별 및 억압과 관련하는 매우 실천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그에 앞서서 ‘미학’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지켜지는 예술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리고 그런 예술을, 우리는 언젠가 지금의 우리가 될 이들에게 자랑스레 물려줄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예술이 진보와 등가를 이룬다는 것은 환영적인 믿음에 불과하며 미학의 진보와 진보의 미학 사이에는 분명 꽤 먼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양자가 절대 화해 불가능한 영역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양자택일의 거짓 협박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질문과 해답을 찾을 책임이 있고,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으며, 무엇보다 얼마든지 중간 지대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그 중간 지대를 열어나가는 일에 문화예술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다. 고작 몇 번 꿈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환영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펼쳐질 미래 말이다. 그 미래를 손끝으로 더듬어 보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미학적 보수주의’는 시시때때로 표정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어느 날엔 ‘원작’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 어느 날엔 ‘역사적 고증’이나 ‘민족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또 어느 날엔 윤리나 정치의 문제가 예술의 주된 관심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이렇게 온갖 종류의 ‘미학적인 것’을 이유로 PC를 배척할 때 현실의 누군가는 삶다운 삶을 계속해서 유예 당하고 문화예술은 그에 공모하거나 최소한 방관하는 위치에 놓이게 됨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이는 실제 문화예술 내 PC 논쟁에서도 자주 간과되는 것 중 하나인데, PC는 사상이나 학문 체계 안에서만 맴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차별 및 억압과 관련하는 매우 실천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그에 앞서서 ‘미학’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지켜지는 예술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리고 그런 예술을, 우리는 언젠가 지금의 우리가 될 이들에게 자랑스레 물려줄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예술이 진보와 등가를 이룬다는 것은 환영적인 믿음에 불과하며 미학의 진보와 진보의 미학 사이에는 분명 꽤 먼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양자가 절대 화해 불가능한 영역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양자택일의 거짓 협박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질문과 해답을 찾을 책임이 있고,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으며, 무엇보다 얼마든지 중간 지대를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그 중간 지대를 열어나가는 일에 문화예술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다. 고작 몇 번 꿈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환영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펼쳐질 미래 말이다. 그 미래를 손끝으로 더듬어 보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미학의 진보와 진보의 미학 사이는 분명 꽤 먼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양자가 절대 화해 불가능한 영역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양자택일의 거짓 협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질문과 답을 찾을 책임이 있고, 중간 지대를 개척할 능력이 있다.
그 중간 지대를 열어나가는 일에 문화예술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다. (사진출처: 셔터스톡)
우리에겐 양자택일의 거짓 협박에서 벗어나 다양한 질문과 답을 찾을 책임이 있고, 중간 지대를 개척할 능력이 있다.
그 중간 지대를 열어나가는 일에 문화예술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는다. (사진출처: 셔터스톡)